1 / 2
" 제주대"으로 검색하여,
13 건의 기사가 검색 되었습니다.
-
“빈부격차는 공중(The Public)에게 가장 오래된 것이면서도 가장 치명적인 질병이다.” 『영웅전』의 저자인 로마시대 그리스인 철학자 플루타크의 말이다. 무려 2천년의 세월을 넘나든 이 철학자의 위대한 통찰력에 깊은 경외감을 느낀다.그렇다. 플루타크의 말은 단순히 수사가 아니다. 빈부격차는 실제 건강격차를 낳는다. 울산대 의대 강영호 교수의 연구를 보면 서울 강북구에 사는 사람이 질병과 사고 등으로 숨질 가능성은 서초나 강남구에 사는 사람보다 30% 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경제적 배경이 다른 동네에 따라 사는 이들의 수명의 차가 나타나는 것이다.가난은 질병의 원인이며 질병은 많은 이들을 가난에 빠뜨린다. 가난과 질병 그 악순환의 고리다. 기실 소득 직업 학력 등 사회경제적 배경의 차이가 건강격차를 낳는 사실을 입증하는 연구는 국내서도 수없이 많다.30-69살 남녀 8414명을 대상으로 4년 동안 사망여부를 추적해 교육수준이 고졸미만인 사람은 고졸이상인 사람보다 사망할 위험이 1.9배 높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또한 2003년 중졸이하 저학력의 흡연율은 대졸이상 남자 고학력층에 비해 10-38% 높게 나타난 연구도 있다.건강행태에서도 학력과 소득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질병의 발생 자체가 소득계층 간에 불평등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인 연구도 있다.제주대 의대 이상이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암의 경우 남자 저소득층 20%가 상위 20%에 비해 암 발생률이 1.65배 높았다. 암 환자를 3년 동안 추적 관찰한 또 다른 연구에서는 소득구간을 5구간으로 나눴을 때 최하 소득계층이 최상 소득계층보다 유의하게 더 많이 죽는 것으로 밝혀졌다. 유방암의 경우 2.13배였다. 기초생활수급자는 무려 3배나 더 많이 죽었다.이른바 우리 사회의 건강불평등 현상이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일찍 죽게 되는 사람들 우리 사회는 언제까지 이 문제를 방치할 것인가? 우린 언제까지 이를 그냥 두고 봐야만 하나? 이는 윤리적으로 부당하다. 한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의료이용에서도 이런 불평등이 뚜렷하며 이 또한 건강불평등으로 나타난다. 가난한 이들일수록 병에 더 잘 걸린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더 절실히 치료가 필요하다. 의료필요가 더 많은 것이다.하지만 의료이용 총량을 살펴보면 가난한 이들이 오히려 의료서비스를 더 적게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용하는 의료서비스의 질도 소득계층에 따라 차이가 있음은 물론이다. 위암 자궁경부암 유방암의 경우 가난한 이들에게서는 이를 대체로 늦게 발견한다.암의 경우 조기발견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이는 생명과 직결된다. 특히 위에 열거한 암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들 암은 조기에 발견해 손을 쓰면 생존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암에 대한 조기건강검진의 기회를 더 자주 더 많이 주어지게 한다면 적잖은 이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을 게 아닌가?2007년 대선의 해 대선주자들의 다투어 이런저런 정책을 발표하고 있지만 정작 국민의 기본권인 건강권의 차별이 이렇게 현저하게 발생하고 있는데도 이를 정책으로 제시하는 대선주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고도 한국사회가 인권사회라고 할 수 있나?이런 배경에는 우선 정부의 태도와 의지부족이 적잖은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가 건강불평등에 관심을 보인 것은 아주 근년의 일이다. 그것도 언론과 학자들의 제기가 있자 마지못해서다.<한겨레>가 이 이슈를 제기할 무렵 복지부는 공식 보도자료까지 내어 사회문화관계장관회의에서 다루겠다며 반짝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저 일시적 관심과 선언적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주무부처가 이러한데 다른 부처 특히 경제부처나 정치공학에만 빠져있는 정치권은 오죽하겠는가?이런 상황에서 건강불평등 문제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지지를 얻기란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한 복지부 관리는 기획보도 당시 <한겨레> 취재진의 물음에 “건강형평성 방안에 대해 고민은 했지만 아직 형평성 측정 잣대라든지 형평성 달성을 위한 근본인 계획은 세우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건강에 대한 우리의 그릇된 시각도 큰 원인이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건강은 개인 또는 개인이 하기에 달렸다고 본다. 이게 일반적 통념이다. 부모한테 얼마나 좋은 유전자나 체력을 타고 났나? 비록 허약체질이더라도 얼마나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했나? 얼마나 좋은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나? 한 사람의 건강은 바로 이렇듯 그 당사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전적으로 달려있다고 보는 것이다.기실 이런 개인적 관점은 건강을 사회경제적 시각에서 보는 눈을 가로막는다. 그저 개인적이고 당연한 일을 또 궁극적으로 해결 가능하지도 않는 개인적 일을 두고 웬 호들갑이냐는 식이다. 이러쿵저러쿵 할 필요가 없으니 정부 정책으로 이를 풀어야 한다는 시각에도 뚱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 관점으로는 한 사회 구성원들의 건강문제를 궁극적이며 본질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다.개인적 관점은 왜 어떤 사회는 다른 사회보다 더 전체적으로 건강한지 왜 영아를 비롯한 어린이 사망은 가난한 곳에 더 많은지 왜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 노동자보다 건강하지 못한지 등을 설명하지 못한다.소득수준 재산 직업 인종 등 다양한 ‘사회경제적 요인’들이 개인의 태생적 조건 못지않게 사람들의 건강에 깊이 영향을 끼친다는 보고는 이미 선진국에서는 ‘상식’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방식으로 사회정책 또는 국가정책으로 이를 풀어야 한다는 논지 또한 이미 상식이 되어 있다.건강불평등을 낮추기 위해서는 우선 의료의 문턱을 대폭 낮춰야 한다. 장벽을 없애야 한다. 누구나 의료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 적어도 돈이 없어 의료이용을 제대로 못하는 건 없애야 하지 않겠나?의료보장 체계의 획기적인 개혁이다.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더 높여야 하며 누구나 자신의 지근거리에서 병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회경제적 격차를 줄이는 노력이 이뤄져야 한다. 최저생계비, 최저임금을 올려야 하며 소득을 일정하게 보장해주는 사회복지 시스템이 보편적으로 마련돼야 한다. 한마디로 보편적 복지국가가 돼야 건강불평등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참여정부 들어서는 건강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주력하기 보다 엉뚱하게 이를 악화시키는 의료산업화 논의가 더 무성했다. 보건의료의 영역에서도 거의 예외 없이 신자유주의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양극화의 문제를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그 극심한 양상의 핵심적 증거인 건강불평등 현상에 대해선 구체적이고 실천력 있는 어떠한 의미 있는 정책도 없었다.건강불평등 문제 해결의 노력은 어쩌면 한 사회의 인권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인권선언은 건강은 누구나 누려야할 인권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선언은 25조에서 “모든 사람은 의식주 의료 및 필요한 사회복지를 포함해 자기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도 일찍이 “모든 이에게 건강을!”이란 구호를 내세우며 건강불평등 문제를 정책목표로 세우기도 했다.한국사회도 적어도 법적으로는 이 문제를 명확히 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35조에서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적어도 개인적 수준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사회 구조적 요인으로 인해 건강불평등이 악화하는 상황을 줄이려는 사회적 노력은 사회발전은 물론 인권적 차원에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전 건강형평성학회장인 조홍준 교수 (울산대 의대)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건강불평등 더는 ‘개인’의 책임으로 두고 방기할 수 없지 않은가?
-
우리나라 국민들은 의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필자는 그것이 궁금하여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격식 없이 물어보곤 하였다.면허 낸 도둑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고 안정된 직업을 가진 부러운 존재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꼭 필요한 존재라는 데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더불어 우리나라 의사들이 참 똑똑하고 실력이 좋다는 말도 빼먹지 않는다. 자기의 자녀도 공부만 잘하면 한 번 도전해 보라고 권하고 싶은 직업이란다.이렇듯 우리 국민들은 의사라는 직업을 부러워하고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대체로 우리나라의 의사들을 존경하지는 않는단다. 꼭 필요는 하되 거의 존경 받지는 못하는 존재가 의사라는 데는 많은 분들이 공감하는 것 같다.우리나라에서 의사는 누구인가? 먼저 의사는 의료전문가다. 오랫동안 공부한 잘 훈련된 전문가다. 이 부분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다. 원래부터 똑똑한 사람들이 의과대학에 입학하였고 의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죽도록 노력했으니 확실히 실력 있는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다.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의 의료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국민들도 이 부분은 확실히 인정하는 것 같다. 필자도 지금까지 우리나라 의사들의 기술 수준을 탓하는 사람들을 거의 보지 못하였다.한편 대학병원 교수 등 일부 봉직 의사를 제외하면 우리나라 의사들의 대부분은 의료업을 운영하는 개인사업자 또는 예비 개인사업자다.우리나라 의료법은 의사와 비영리법인만 의료기관을 개설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의사는 어떤 종류의 의료기관이든 개설해서 사업자가 될 수 있다. 사업자는 돈을 벌어야 한다. 그래야 의료기관을 유지하거나 크게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박정희 전 대통령 이래로 과거 권위주의 정권들은 병원 등 의료자원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을 거의 배제하고 이를 민간이 주도하도록 했다.오로지 국민 의료에 대한 정부의 재정 부담을 줄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차츰 국민소득이 늘어나고 법정의료보험이 실시됨에 따라 의료수요가 급속히 늘어났는데 이 과정에서 민간의료기관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의료수요를 충당하였던 것이다.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오늘날 전체 병원 중 공공병원의 비중은 1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유럽 국가들의 60-90%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뿐더러 심지어 미국이나 일본의 30% 수준에도 크게 못 미치게 된 것이다.경제성장이 급속하게 추진되던 1970대 중반 이래로 지난 30년 동안 청진기 하나로 의료업을 시작하였던 많은 의사들이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지금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굴지의 여러 대학병원들도 이러한 성공 신화의 산물이다. 과거에 돈 벌어서 건물 사고 땅 매입하여 부자가 되지 않은 의사들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당시 의사는 면허 낸 도둑이라는 세간의 이야기가 그리 근거 없는 말은 아닌 셈이다. 한국 사회에서 의사는 이렇게 사회적으로 의료전문가보다는 개인사업자로 더 크게 규정되었던 것이다.1989년 우리나라는 법정의료보험을 시작한 지 꼭 12년 만에 전국민의료보험제도를 달성하게 된다. 이는 세계 의료보장의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최단기의 성과였다.이것은 국민의료보장에는 축복이었으나 의사들에게는 큰 시련의 시작이었다. 전국의 모든 의료기관이 건강보험의 통제된 의료수가를 강제로 적용받도록 했기 때문이었다.이러한 제도는 지금까지 20년 동안 지속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의사의 높은 기대소득은 실현되기 어려운 조건을 만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 동안 변화된 의료 환경으로 인해 의료기관을 개설하는 데 소요되는 초기 비용 부담도 엄청나게 커져버렸다.이제 의료사업자로 살아남기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어려워진 것이다. 국민의료비의 급증과 함께 정부의 의료수가 통제도 더욱 강화되는 추세다.과거에 관행적으로 존재하던 각종 리베이트도 크게 줄었다. 의료사업자의 수도 크게 늘어났고 시장 경쟁도 치열해졌다. 의료사업자인 의사들이 과거에 비해서는 크게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그렇다고 국민들의 의료비 부담이 작은 것도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민의료비 수준은 국내총생산(GDP) 약 6.4% 수준이다.유럽 선진국들이 현재 약 8-11% 수준인데 이들 나라의 국민소득과 노인인구의 비율이 우리나라 수준이었을 때와 비교해 보면 현재 우리나라의 국민의료비가 그리 작은 것도 아니다.국민의료비를 조금 더 늘릴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최근 수년 동안 급속히 증가해온 국민의료비 증가추세를 볼 때 이것도 쉽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의사는 더 많은 수입을 원하고 국민들은 더 이상의 의료비 부담을 원하지 않는다. 이 이해의 간극은 점차 더 벌어지고 있다.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다. 이제 정치가 필요하다. 큰 틀에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야 한다.현재 우리나라 의사들은 제공한 의료서비스에 대해 ‘의료행위 하나하나에 대해 미리 메겨진 가격대로 비용을 지불하는 행위별수가제’ 방식으로 의료비용을 지불 받고 있다.특정 질병에 대해 의료행위를 많이 할수록 수입이 더 많아진다. 행위별수가제는 자유시장주의 원칙에 가장 부합하는 의료보수 지불방식이다. 그런데 의료는 근본적으로 자유시장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시장실패의 영역이다.이렇게 의료 자체의 성격과 행위별수가제는 본질적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서로 간에 잘 맞지 않는 관계다. 그래서 서구의 모든 나라에서 행위별수가제의 폐단을 줄이고자 다양한 의료보수 지불방식을 도입하여 병행 실시하거나 행위별수가제에 여러 가지 제약을 가하고 있다.그런데 우리나라의 의사들은 요지부동이다. 행위별수가제를 포괄수가제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개혁하자는 주장에 대해 결사 반대를 외친다.인두제 방식의 주치의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에서는 의사가 자신에게 등록된 주민들의 건강증진과 질병예방을 위해 노력할수록 의사의 수입이 더 늘어난다.주민들이 병에 걸리지 않고 더욱 건강해야 의사의 수입이 늘어나는 구조다. 행위별수가제 하의 우리나라에서는 상황의 전개가 정반대다.환자가 늘어나야 의사의 수입이 늘어난다. 환자 진료를 많이 해야 과잉 진료를 할수록 의사의 수입이 늘어난다. 온 나라가 환자로 크게 넘쳐나면 의사들의 수입은 극대화된다.사업자로서의 의사는 이러한 상황이라야 돈을 크게 벌게 되는 것이다. 의료전문가로서의 의사와 개인사업자로서 의사가 격렬하게 내부적 갈등을 일으키는 이러한 의료제도 하에서 의사와 잠재적 환자인 국민이 동거하고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다.우리 국민들은 지금보다 더 좋은 의사를 원한다. 그로부터 더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고 싶어 한다. 더 좋은 의사의 양성은 개인적 소양을 높이는 개별적 방식으로는 달성되기 어렵다.의료 윤리 교육을 더 시킨다고 좋은 의사가 더 늘어날 공산도 없어 보인다. 유럽 의사들이 우리나라 의사들보다 개인적 차원에서 더 윤리적이고 더 훌륭하다고 볼 근거는 별로 없다.그런데 의사들의 행태는 더 좋음에 분명하다. 결국은 국가의료제도의 문제다. 우리나라 국가의료제도를 ‘좋은 의사’가 될수록 더 수익이 많아지도록 국민의료비의 낭비가 최소화되도록 개혁해야 한다.이제 자유시장주의 원리에 의존하는 행위별수가제와 같은 나쁜 의료제도는 폐기하거나 적절하게 규제할 때다. 그리고 의사와 국민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여 크게 결단을 내릴 때다.바야흐로 큰 틀의 의료정치가 필요한 것이다. 서로가 원하는 것을 주고받아 이것을 제도화해야 한다. 결국 좋은 의료제도 좋은 의사 그리고 만족해하는 국민은 의료정치를 통해 달성될 하나의 세트인 것이다.
-
최근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와 여당이 대기업과 부동산 부자들을 위한 감세정책을 추진하자 보수야당도 덩달아 서민을 위한 감세정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가히 보수여당과 보수야당 간의 감세 경쟁이고 인기영합주의 경쟁이다. 이것이 보수정치계의 인기영합주의인 것은 분명한데 과연 국가발전에도 이로울까?그리고 이것이 서민과 중산층의 삶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여야가 경쟁적으로 세금 부담을 줄인다고 하니 중산층과 서민의 살림살이가 좀 나아질까?한나라당은 종합부동산세의 과세기준을 현행 6억원에서 9억원으로 올리고 현행 세대별 합산과세를 인별 합산과세로 변경하는 방안을 추진하려고 한다.종부세 대상자는 지난해 기준으로 우리나라 전체 세대의 2% 남짓한데 이들 중 61%는 주택을 여러 채 소유한 세대들이다. 한나라당의 이번 감세 조치는 한 마디로 강부자 정권이 부동산 부자들의 세금을 크게 줄여 주기 위한 것이라는 게 언론의 대체적 분석이다.뿐만이 아니다. 유가환급금 지급과 유류세 인하 법인세율 인하에 이어 재산세와 양도소득세 인하 등 이명박 정부와 여당의 감세 리스트는 길기만 하다. 이로 인해 15조원 내지 20조원의 세수 감소가 예상된다고 한다.보수야당도 만만치 않다. 민주당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간접세인 부가세를 일률적으로 인하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한다.언론에 의하면 노무현 정부에서 경제부총리를 역임하였던 김진표 최고위원이 한나라당의 강부자 감세정책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한시적인 부가세 감세안을 제시하였다고 한다.내용인 즉 부가가치세율을 현행 10%에서 5%로 내리자는 것인데 이 경우 약 20조원의 세수 감소가 예상된다고 한다. 그래서 민주당은 금년 4/4분기부터 내년 말까지 1년 3개월 동안 부가가치세율 5%를 적용하고 그 후 2010년에는 이 세율을 다시 8%로 올리고 2011년에는 원래대로 10%로 되돌린다는 구상을 논의 중이라고 한다.얼핏 보면 민주당의 한시적 부가세 감세안이 이명박 정부의 강부자 감세방안 보다는 더 서민 친화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도 크게 잘못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현재 우리나라는 이하에서 언급할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근본적으로 감세정책을 추진해서는 안 된다. 더불어 부가가치세는 간접세로 상류층에게나 서민층에게나 물건을 살 때 똑 같이 적용되는 세금이므로 감세의 혜택도 같고 그리하여 소득 역진적이다. 결국 이것도 부자들에게 더 유리한 방식이다. 서민을 위한 것이 아니다.더 큰 문제는 최근의 이러한 감세 경쟁이 우리나라의 국가발전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강부자 정권에 경도된 사람들이 아니라면 누구나 동의할만한 그래서 지난 대선에서 통합민주당마저도 대거 공약에 포함하였던 역동적인 사회경제정책들을 이 땅에 실현하지 못하는 한 우리나라의 국가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현재 우리나라에서 국가발전의 가장 큰 구조적 장애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 수출산업과 내수산업의 양극화 이에 연계된 노동시장(일자리)의 양극화다.대기업이 아무리 잘 나가고 수출이 호조를 보이더라도 그 과실은 수출 중심의 대기업에 국한될 뿐이고 내수경제와 서민과 중산층의 가계에는 별 긍정적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그렇다고 대기업의 좋은 일자리가 늘어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서민과 중산층의 입장에서는 그림의 떡일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양극화만 심화되는 것이다. 역동적 사회경제정책들을 통해 양극의 연결통로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국가발전이 가능해진다.이명박 정부와 여당이 추진 중인 또는 구상 중인 감세정책은 대부분이 대기업과 부자들을 위한 것이다. 피상적으로 보더라도 현 정부의 감세정책으로 인해 현재 우리사회가 이미 겪고 있는 양극화의 고통은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그런데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서민과 중산층이 겪게 될 양극화의 비용과 고통이 엄청난 것임을 알게 된다. 최소한 이명박 정부가 집권하지 않았더라면 통합민주당이 집권을 하였던 진보정당이 집권을 하였던 어느 경우든 간에 상대적으로 진취적인 많은 사회경제정책들이 시행되었을 터이다.이것들이 현 정부 하에서 시행되지 않음으로 인해 또는 소위 민주정부 10년 동안 추진되어 왔던 기존의 사회경제정책들이 후퇴함으로 인해 겪게 될 민생의 고통이 엄청날 것이라는 점이다.먼저 육아를 위한 사회적 보육체계를 보자. 우리나라의 보육 공공성 수준은 유럽 선진국의 20%-50% 수준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사적영역에 맡겨져 있다. 고스란히 가계의 부담이다. 경제적 능력과 처지에 따라 보육 여부와 수준이 결정되고 자녀를 가진 여성의 직업 활동도 이에 묶이게 된다.우리나라의 교육은 이보다 더하다. 명목상으로는 중학교까지 무상교육이지만 이건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사교육이 공교육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결국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자녀의 사교육 선택과 학력수준이 결정된다. 대학의 등록금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우리나라는 원천적으로 교육에서 기회가 평등하지 않은 나라다.부모의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가 고스란히 사교육과 서열화 교육 시스템을 통해 대물림되는 ‘신 신분사회’에 다름 아니다.최종적으로 서열화 된 상위권 대학에 들어간 10%가 좋은 일자리를 독차지하고 또 다시 이를 그들의 자녀들에게 대물림하는 사회가 ‘기회가 평등’한 나라인가? 여기서 80%의 서민과 중산층은 설자리가 없음이 분명하다.의료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는 전체 국민의료비의 53%만이 공적방식으로 조달된다. 프랑스와 스웨덴 등 유럽 선진국들은 국민의료비의 공공성 수준이 대개 85%를 상회한다.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의료공공성 평균 수준은 우리나라보다 약 20% 포인트 더 높은 72%다. 공공의료비는 국가에 따라 세금이나 건강보험료로 충당되는데 이는 서민과 중산층에게 이득이 크게 돌아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세금이나 건강보험료는 상대적으로 부자들이 아주 많이 내는데 의료이용에 대한 혜택은 빈부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동일하기 때문이다.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럽 선진국들은 보건의료에서 더 많은 공공성을 유지하기 위해 의료에서 공적영역의 크기를 최대한 키우기 위해 세금과 건강보험료의 수준을 높게 유지하고 있다.노동시장에서도 그렇다. 우리나라에서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에 취업한 사람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높은 임금과 관대한 기업복지뿐만 아니라 4대 사회보험 혜택도 잘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중소기업은 그렇기 못하다. 특히 경영이 어려운 중소기업들은 그나마 있던 정규직도 직장에서 내몰고 그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채운다. 비정규직이 제도적으로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이들 비정규직들은 4대 사회보험이 아예 없는 경우가 많다. 사회보험 비용에 대한 중소기업의 부담 때문에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경우가 많으므로 정부가 이 부분에서 재정정책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부재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뿐만 아니다. 노동자가 한 번 길거리로 내몰리면 갈 곳이 없는 차가운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제대로 된 재취업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 그러니 필사적으로 구조조정에 대항한다.우리나라 경제 전체적 입장에서 꼭 필요한 구조조정마저도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다. 경제구조의 경직을 낳게 되고 기업의 유연성이 제약 당한다. 그리고는 이 모든 탓을 구조조정에 저항하는 노조 탓으로 돌려버린다.이는 전형적인 마녀사냥이다. 언제까지 이 구조적 문제를 기업과 노동자 간의 사적 문제로만 치부해버릴 것인가? 이것은 우리 사회의 근본적 문제이고 국가가 그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불능에서 비롯된 문제들이다.국가가 보편적 복지와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으로 합리적 해법을 찾아 개입해야 할 영역을 시장에 맡겨버린 데서 초래된 구조적 문제들인 것이다.노후 소득보장도 마찬가지다. 노후 소득이 없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분들의 대부분은 부양을 맡을 자녀가 없는 독거노인 또는 부부노인이거나 서민가계의 노인들이다. 서민가계가 버텨낼 재간이 없게 된다.자녀의 보육과 교육 내 집 마련 의료비 일자리 불안 등으로 경제적 여유가 거의 없는 서민가계에서 노령의 부모를 경제적으로 봉양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결국 보편적 복지와 노후 소득보장제도가 없는 국가에서 살아가는 서민과 중산층 가계는 이중삼중의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돈 많은 부자들이야 갑자기 파산해서 가난해지지만 않는다면 별 부담과 걱정이 없겠지만 말이다.이제 보편적 복지를 논할 때다. 보편적 복지는 중산층과 서민을 포함한 모든 국민이 필요한 사회복지 혜택과 서비스를 누리는 것을 말한다. 당연히 그에 따른 부담도 온 국민이 자신의 능력에 따라 분담해야 한다.보편적 복지의 선진국인 유럽 국가들이나 후진국인 미국이나 사실 이들 서비스를 모두 이용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차이가 있다면 이들 서비스를 공적방식으로 이용하느냐 혹은 사적방식으로 이용하느냐의 차이만 있는 것이다.유럽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이나 우리나라의 학생들도 학교엘 간다. 등록금과 엄청난 사교육비를 가계가 직접 부담하느냐 아니면 정부가 공교육에 엄청난 투자를 해서 그것만으로 충분하도록 교육을 공적으로제도화하였는가가 다를 뿐이다.그런데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여준다. 교육을 통해 사회적 지위와 빈곤을 대물림하는가? 아닌가? 진정한 교육기회 평등의 보장인가? 아닌가? 서민과 중산층 가계의 고통인가? 아닌가? 분명한 것은 중산층과 서민에게는 시장방식인 사적방식보다는 공적방식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점이다.평소에 세금이나 건강보험료를 충분히 납부하고 몸이 아플 때 사회적으로 조달된 이 공적 재원으로 해당 의료비를 해결할 것인가?아니면 미국처럼 공적의료보장제도 없이 개인의 책임 하에 개별가계가 알아서 의료비 문제를 해결하도록 할 것인가? 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보편적 복지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이렇게 단순한데 그 결과의 차이는 실로 엄청나다. 미국 영화 ‘식코’의 비극을 보라. 우리나라 보다 5배 유럽 국가들 보다 2-3배나 많은 의료비를 사용하면서도 선진국은 물론이거니와 우리나라보다도 건강수준이 저열한 나라가 미국이다.의료이용의 사회계층별 양극화가 최악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5천만 명의 미국인이 의료보험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오죽하겠는가?적극적 노동시장정책과 평생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부분을 공적영역으로 삼아 온 국민이 일자리 불안에서 벗어나고 재취업을 하는 데서 안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적극적 노동시장정책과 평생교육이야말로 최고의 일자리 정책임과 아울러 고용의 유연안정성을 확보하는 최고의 노동정책이기도 하고 적극적 산업정책임과 동시에 최고의 인적자원 개발정책이기도 한 것이다.세상사의 중요한 일들을 사적영역인 시장에만 맡겨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시장에 주로 맡겨서 잘 될 일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그런데 시장에 맡겨서는 안 될 일들도 참으로 많다. 주로 민생과 관련된 부분이 그러한데 이는 정부와 사회의 영역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이 일들을 방기하고 무책임하게 시장에 맡겨버리면 반드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고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추가적으로 들어가기 마련이다.이 과정에서 가장 큰 고통을 치르는 계층은 중산층과 서민이다. 사회경제적으로 시장의 역할이 커질수록 80대 20의 사회는 90대 10의 사회로 극단적 분열을 겪을 뿐이다.이제 우리는 이러한 철 지난 시장만능주의로는 우리의 국가발전과 미래를 열어갈 수 없는 시대를 경과하고 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와 여당 정치세력은 안타깝게도 시대를 역행하고 있다. 시장만능과 감세정책에 매달리고 있으니 말이다. 이제 시장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역할이 더욱 강조될 시기인 것이다.감세는 절대로 안 된다. 감세는 정부의 재정능력을 줄이고 사회경제정책을 수행할 정부의 힘을 무장 해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세는 역동적 복지국가의 적이다. ‘역동적 복지국가’는 성장과 분배를 통합적 시각으로 바라본다.‘역동적 복지국가’는 성장과 분배의 이분법적 분리와 성장 우선주의를 배척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동적 복지국가’는 더 많은 보육 및 교육 재원 더 많은 건강 및 노후보장 재원 더 많은 공적 주거재원과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을 위한 재원 그리고 더 많은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 재원을 필요로 한다.이러한 사회경제정책을 통해 사회적 자본과 인적자본이 공고하게 확충되고 온 국민의 보편적 똑똑함과 창의성으로 우리 경제의 혁신동력을 창출하고 지식기반경제에 부합하는 올바른 경제성장의 길로 나갈 수 있게 된다.우리는 더 큰 정부재정을 필요로 한다. 대한민국의 올바른 국가발전 전략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올바른 국가발전 전략을 위한 충분한 국가재정을 확보하고 있는가? 전혀 그렇지 못하다.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재정 지출의 규모를 국제적으로 비교해보면 그 실상을 금방 알 수 있다. 주요 국가의 2007년 현재 GDP 대비 국가재정 지출의 비율을 보면 스웨덴이 56.3% 프랑스 53% 독일 45% 네덜란드 45% 유로권 평균이 46.9% 영국도 45.7%로 매우 높은 수준인데 비해 미국은 36.6% 일본은 37.8%로 비교적 낮은 편이다.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우리나라는 2007년 현재 GDP 대비 국가재정 지출의 비율이 30.1%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국가재정은 세계적 기준에서 볼 때 매우 부실한 것이다.정부가 보편적 복지와 역동적 복지국가를 위해 무엇을 하려고 해도 정부재정이 부족하여 할 수가 없는 실정이다. 이것은 주요 국가의 국가재정 지출 구조를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게 된다.우리나라는 국가재정에서 가장 좁은 의미의 복지 관련 예산을 의미하는 ‘사회보호’ 지출의 비중은 9.7%에 불과하다. 스웨덴은 42.5% 덴마크 45% 프랑스 39.3% 독일은 46.6% 등이었고 미국도 19.5%였다.여기서 결론을 내리자면 우리나라는 국내총생산 대비 정부재정의 규모가 선진국의 60% 수준에 불과하고 정부재정에서 ‘사회보호’가 차지하는 비중은 선진국의 25%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국내총생산에서 정부재정이 차지하는 비중이 이렇게 작다는 것은 국민의 사회경제 생활에서 국가의 공적 영역이 차지하거나 관여하는 부분의 비중이 매우 작고 대부분의 생활 영역이 사적공간에 맡겨져 있음을 의미한다.그야말로 시장이 지배하는 국가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시장만능주의를 여기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시장만능주의 사회경제체제에서 기회의 평등은 있을 수 없는 법이다.시장만능주의 하에서는 사회적 자본과 인적자본이 취약한 까닭에 사회통합과 혁신동력 그리고 미래지향적 지식기반경제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지금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시장이 아니라 더 큰 정부의 역할이다.민생에서 더 넓은 공적 영역의 확보가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재정이 지금보다 훨씬 더 커져야 한다. 세금의 탈루를 막아야하고 세원의 추가적 발굴이 필요하고 세율을 높여야 한다.특히 양극화된 한국사회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부자들이 더 많은 세금을 냄으로써 우리사회의 통합적 발전에 더 많이 기여하도록 사회정치적 합의를 모아나가야 한다.이러한 이유로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당치 않은 보수여당과 보수야당의 감세경쟁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이들의 천박한 인기영합주의가 결국 중산층과 서민의 고통을 심화시킴과 동시에 극단적 양극화를 초래하고 우리나라의 올바른 국가발전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심각하게 저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
의료정책 및 지역보건행정’을 전공으로 제주대학교 교수로 임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2006년 봄 영리병원의 성공적 유치를 목표로 하는 제주보건의료발전계획 수립 연구용역을 하는데 공공의료 강화 부분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영리병원 유치를 위한 보완적 성격에 불과한 것이라 썩 내키지 않아서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하러 간 자리였다. 예상치 못한 질문을 하나 받았다.제주에서 ‘인생역전’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냐는 것이었다. 말은 들어봤지만 왜 그런 질문을 던지는지 잘 모르겠기에 무슨 뜻인지 설명을 요청했다.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인생역전이란 제주도 내 병원에서 3-4달 후면 돌아가실 거라는 사망선고를 받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울에 큰 병원 찾아 갔다가 멀쩡하게 살아서 공항에 번듯하게 나타난 사례를 말하는 것이다.제주에서 제일 번화한 길거리에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둘 중 하나는 가까운 일가친척 중 그런 사례가 다 있다’제주 실정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지 말라는 소리를 점잖게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악한 의료 인프라 때문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 영리병원을 허용해서라도 좋은 병원을 유치하는 게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할 말이 없지는 않았지만 과거에 있었던 제주도 의료의 모습을 다소 과장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었기에 여기에 토를 달기가 어려웠다.지금 제주에서는 국내 영리병원 허용을 비롯한 온갖 의료민영화의 핵심 조치들이 시범적으로 추진되고 있거나 곧 추진될 예정이다. 이런 정책을 추진하는 핵심 명분은 열악한 의료 인프라 개선과 의료관광을 통한 지역 경제 활성화로 요약할 수 있다.수많은 ‘인생역전’ 탓에 이러한 논리가 제주에서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며 먹혀들고 있다. 다른 지면을 통해 수차례 ‘영리병원을 통한 의료관광 활성화’ 주장의 허구성과 ‘제주에 국내 영리병원 허용이 실질적 의료 인프라 개선 효과 없이’ 일부 소규모 전문 병·의원들이 갈망하는 자본조달 기전의 합법화를 위해 악용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해 왔기에 이 글에서 그 문제를 반복하지는 않겠다.다만 이글에서 문제 삼고 싶은 것은 경제부처를 중심으로 한 국가권력이 ‘의료민영화’를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 의료 인프라가 제일 취약하고 경제전망이 어두운 지역을 악의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보다 좋은 의료 인프라에 대한 지역주민의 열망을 약한 고리 삼아 끊어내고 국내 영리병원 허용을 ‘전국화’하여 의료민영화의 돌파구를 마련하겠다는 것이 참여정부 이래 의료민영화 추진론자들의 전략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정말 나쁜 짓이다.서울 출장길에 종종 접하는 장면이 있다. 김포행 비행기에 탑승하다 보면 연이은 몇 자리에 커튼이 쳐진 경우를 볼 수 있다. 몇 번의 경험을 거친 후 알게 된 사실인데 서울의 유명 대학병원을 찾아가는 중증환자가 누워있다는 표식이다.그리고 그 주위에는 진료의뢰서를 만지작거리는 보호자가 있거나 환자를 대동하는 젊은 의사가 보인다. 나 같은 사람 즉 제주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이자 책임 있는 의료정책 전문가가 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장면을 대하고 나면 머리가 복잡해진다.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떠한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열 받는 것은 이와 같은 안타까운 사연을 교묘하게 활용하고 있는 ‘의료민영화’ 추진 세력의 교활함이다.국내 영리병원 허용을 통해 제주가 얻을 것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 ‘영리병원’은 명품병원이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까지 적용되니 더없이 좋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 엉터리 논리로 혹세무민하는 이들의 행동에는 솔직히 할 말을 잃게 된다.사상의 자유가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의료민영화를 주장할 수도 있고 제도화를 추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경우에는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절차와 형식에 충실해야 한다.더 이상 바라지도 않는다. 단 조건이 하나 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열악한 조건에 처한 사람들을 이용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주도에서는 더욱 안 된다.이명박정부와 한나라당은 국내 영리병원 허용을 테스트하려거든 차라리 서울 한복판에서 하라. 그것도 이 정부와 한나라당의 열성 지지자들이 제일 많이 사는 강남구와 서초구에서 말이다.
-
한나라당이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그들이 뭘 잘 해서가 아니라 범민주진영이 워낙 못한 탓이었다. 광범위한 민심이반이었다. 압승한 한나라당 정권이 출범한 지 이제 겨우 한 달이다.그런데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염증이 지난 참여정부 5년에 걸쳐 일어났던 것에 버금가는 듯하다. 국민의 실망과 염증은 곧 광범위한 민심이반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그러나 이번 총선에서 허탈한 민심을 받아 안아줄 대안이 있는가? 준비된 국가비전을 제시하는 대안 정치세력이 있는가 말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우리는 역동적 복지국가로 가야하고 중산층을 포함한 도시서민과 노동자 농민 등 온 국민이 모두가 행복한 복지국가를 꿈꾸건만 이를 이루어낼 선도적 정치세력은 어느 곳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이것이 작금의 우리나라 정치현실이다. 한나라당이 계파싸움과 공천갈등 내분 때문에 지리멸렬로 치닫고 있어도 그래서 정당 지지율이 떨어져도 통합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범 민주 또는 진보정치세력의 정당 지지율은 좀처럼 오르지 않는다.명망성과 개인기가 뛰어나거나 이미 지역의 정치토호나 기득권세력으로 깊이 뿌리를 내린 일부 범야권 정치인들이 지지율 선두를 달리고 있을 따름이다.이번 총선의 투표율은 사상 최저가 될 전망이다. 한나라당이 못마땅해지고 있음에도 어느 정치세력도 한나라당의 대안이 될 실력 있고 믿음을 줄 수 있는 세력으로 국민적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먼저 통합민주당을 보자. 법률가인 박재승 공심위원장의 혁혁한 공로로 죽어가던 통합민주당이 다시 살아났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생명의 연장만을 보장받았을 뿐이었다.국민 누구도 통합민주당을 한나라당을 대신할 수권정당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한 이유로 다수의 국민들이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에 실망하면서도 통합민주당을 선뜻 지지하지 못하는 것이다.최근의 여론조사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번 통합민주당 공천의 최종 결과를 살펴보자. 모든 언론이 하나같이 ‘용두사미’라고 평가한다. 처음 시작은 신선하고 좋았으되 최종 결과는 실망이라는 뜻이다.공천심사위원회가 법의 잣대를 엄격하게 들이대는 일은 잘 하였으나 통합민주당이 장차 만들고자 하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밝혀줄 어떤 국가비전도 제시하지 못하였고 이에 적합한 유능한 인물을 공천하지도 못하였다.한나라당이 계파공천 나눠먹기 공천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은 당연하겠으나 기실 공천자 인물의 면면을 보면 질적으로는 한나라당보다 못한 공천이었고 역동적 복지국가의 비전을 기대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모자라는 인물들로 가득 찬 공천 도로 열린우리당 잡탕 공천이 되고 말았다.다시 한 번 이념적 성향 상 파노라마 공천이 된 것이다. 이런 인물들이 당선된들 이들을 데리고 어찌 강력한 야당 대안적 수권정당을 만들 수 있겠는가?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국민들에게 주는 실망도 이에 못지않은 수준이다. 진보진영 내부적으로는 불가피한 논쟁이었겠으나 국민들에게는 자기들만의 용어로 싸워대는 운동권 정당의 초라한 모양새가 가히 목불인견이었다.고작 지지율 5%에 불과한 소수 정당이 집안싸움에 몰두하다 집을 두 쪽 낸 세력들에게 골고루 잘했다고 표를 나눠 몰아줄 국민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무엇보다 기가 막히는 것은 기존 민주노동당을 둘로 나누었으되 제살 뜯어먹기 식으로 세력을 분할하였을 뿐 대중정당으로 국민정당으로 대안적 수권정당으로 거듭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아직까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늘 보던 그 얼굴에 그 얼굴이고 그 나물에 그 밥인 것이다. 이래서야 마이너리그 운동권 그들만의 정당 그들만의 잔치가 계속될 따름이다. 여전히 민주노동당은 주사파 정당으로 진보신당은 고루한 PD파 정당으로 존속할 것인가?국민들은 새로움 현재의 민생에 드리운 지속적 불안을 없애줄 새로운 계기 새로운 제도 새로운 사회를 원하고 있다. 통합민주당은 국민이 원하는 그 새로움이 무엇인지 도대체 전혀 모르고 있다. 그들의 인식은 신자유주의의 제도적 틀에 갇혀 있으며 기실 이명박 정부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이번에 공천된 후보들이 총선에서 아무리 많이 살아 돌아온들 신자유주의에 지친 척박한 국민의 삶과 만성적 불안의 해소에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어떤 희망이 되겠는가?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지역구에서 각각 1-2석을 비례대표에서 1-3석을 얻는다 한들 이것이 민생과 국민의 희망에 무슨 큰 소용이 되겠는가?이들 중 누구도 어느 정치세력도 한나라당을 대체할 수권정당이 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는 동일하게 ‘희망 없고 의미 없는 정치세력’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권가능성과 수권능력이다. 권력의 획득을 가시적 목표로 인식하지 못하는 정당은 이미 유효한 정치세력이 아니다. 불임정당이기 때문이다.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5년 후의 수권정당으로 보는 국민은 거의 없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아무리 사고를 치더라도 현재의 통합민주당이 5년 후에 집권당이 되리라고 보는 사람도 극히 드물다.현재의 범야권으로는 수권가능성이 거의 희박하다는 소리다. 설사 지금 상태에서 집권을 한다한들 통합민주당이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보다 국정운영을 더 잘할 것으로 보는 국민도 별로 없을 것이다.이 파노라마 잡탕정당으로는 참여정부의 혼란만을 재연할 따름이지 그 어떤 이념적 확신도 정책적 새로움도 보여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이 집권을 했다한들 이들이 그들의 이념과 정책대로 집권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으리라 보는 국민은 거의 없다.지금으로서는 이들 범야권 정당들 모두가 제대로 된 이념과 국가비전을 가지고 있지도 못할뿐더러 그들의 정책으로 국정을 제대로 운영할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도 못하기 때문이다.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지속적인 신자유주의 정책 추구와 그 결과로서의 양극화 심화 민생의 어려움 국민 불안의 가중은 소위 10%의 상위계층을 제외한 중산층을 포함한 온 국민의 고통 심화로 귀결될 공산이 크다.이러한 조건에서는 5년 후를 대비한 의미 있는 집권 계획이 절실하다. 신자유주의를 맹신하는 범 보수정치세력에 대항하는 범 민주 진보세력의 새로운 정치구상이 필요하다.역동적 복지국가를 중심에 놓고 ‘자유주의진보 정치세력’ ‘사회민주주의 정치세력’ ‘민주사회주의 정치세력’과 ‘시민사회와 학계의 범 진보개혁세력’까지 포괄하는 한국적 정치실험이 필요하다.여기서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봉건적 정치이념이나 교조적 국가사회주의 정치이념이 이러한 한국 사회의 민생과 복지국가 요구에 부합하는 새로운 정치지형의 창출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해야 함은 물론이다.감히 단언하건대 지금 범야권에 펼쳐져있는 정치 지형과 틀은 단지 전환기에 불과하다. 새로운 정치질서의 창출 과정에서 어쩌면 꼭 거쳐야 하는 성장통의 과정이라고 인식하는 지혜로운 자세가 필요하다.세상에 고정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변화한다. 오직 역동적 복지국가를 향한 국민적 요구와 시대적 필연 그리고 이를 향한 새로운 정치의 진전만이 변하지 않고 지속될 뿐이다.이번 총선이 아무리 실망스러운 결과를 낸다고 한들 모든 복지국가 세력이 실망하지 말고 끊임없이 전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이명박 정부는 보건의료체계 민영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기획재정부는 대통령 업무보고를 통해서 민간의료보험 활성화 방안을 상반기 중으로 확정하고 하반기에 입법을 완료하며 영리의료법인 허용 방안도 올해 안에 확정짓겠다는 입장을 천명하였다.구체적인 의료 민영화 방안으로는 전면적인 민영화를 의미하는 미국식 의료보장 모델 혹은 중간단계로서의 네델란드 모델이 주로 논의되고 있다.그동안 관련 전문가들이 예측한 대로 의료 민영화는 ‘요양기관 당연지정제 폐지’ ‘민간의료보험 활성화를 위한 법 개정’ ‘영리병원 합법화’를 요체로 하며 민간의료보험의 역할에 대한 우리 정부의 규제 수준에 따라 미국 모델인지 아니면 네덜란드 모델(2006년에 개혁된 네덜란드 의료보험 방식은 독일식의 조합주의 사회의료보험 방식과 미국식 완전 민간의료보험 방식의 중간 정도에 위치해 있으며 독일식으로부터 미국식으로의 이행기 단계로 볼 수도 있겠음)인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세부추진 방향에 대해서는 앞으로 주의 깊게 지켜볼 일이다.마이클 무어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에서 잘 묘사되어 있듯이 의료 민영화는 의료이용 절차의 복잡함과 까다로움 의료보험료와 국민의료비의 앙등 민간의료보험사의 고비용 환자에 대한 보험가입 거절과 잦은 진료비 지불 거부 높은 의료비로 인한 가계 파탄의 증가 의료이용의 양극화 등 수많은 사회경제적 문제들과 갈등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그럼에도 이명박 정부는 왜 의료 민영화를 추진하려는 것일까? 현 정부가 추진하려는 의료 민영화에 대해 우리가 정확하게 알고 효과적으로 잘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 그저 이명박 정부가 ‘신자유주의의 화신’이기 때문이라는 단순 논리는 이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질 않기 때문이다.우선 의료 민영화에 대해서 청와대와 경제부처를 포함하는 정부 의료 관련 산업자본과 금융자본 한국사회 주류 엘리트들 간에 ‘의료서비스 산업의 육성을 통한 경제 성장 기조의 지속’이라는 굳건한 삼각동맹이 체결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제조업 분야의 투자가 첨단 업종에 집중되고 기술수준이 떨어지는 단순 제조업의 경우 중국이나 동남아로 이전되면서 제조업 전반의 고용창출효과가 지속적으로 저하되고 있다.한마디로 거시경제 운용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제조업 투자의 여지가 줄어들고 내수 진작 효과가 예전만 못한 상황에서 국가경제의 성장 기조 유지와 자본의 수익 창출을 위한 새로운 투자 공간이 절실해졌다.이러한 상황에서 국가와 자본이 주목한 분야가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 즉 의료 교육 금융이다. 영세 자영업자 중심의 국내 서비스 산업의 GDP 대비 매출 비중이 2003년 기준으로 OECD 국가들 평균에 비해 10%나 낮다는 사실은 국내 서비스 산업의 높은 성장 잠재력을 보여준다 하겠다. 또한 서비스업은 제조업보다 취업유발계수가 1.7배 크기 때문에 고용창출효과도 더 높다.의료 분야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007년 OECD 보건통계를 보면 자료를 제출한 19개 나라의 2004년 전체 고용인구 중 보건의료종사자의 평균비율이 6.12%인 반면 우리나라는 3.1%로(2004 경제활동별 지역내총생산 자료 통계청) OECD 국가들 평균에 비해 440429명이나 적다. OECD 평균 수준으로 의료분야의 고용이 확대된다면 45만 명에 가까운 신규 고용창출이 가능하다는 의미다.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미 우리나라의 의료기술은 세계적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국민들이 의료 일선에서 접하는 의료서비스 질이 이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보건의료 분야의 낮은 고용으로 인한 부실한 인적 서비스’에 있다. 동시에 일부 국민들이 ‘의료서비스 질 향상’을 이유로 의료 민영화를 지지하는 왜곡된 인식의 근거가 되고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우리나라에서 보건의료분야의 고용확충 잠재력과 성장 필요성은 이미 충분하다. 문제는 방법이다. 앞서 지적한 신자유주의 삼각동맹은 철저하게 시장의 논리와 자본의 이익에 충실한 방향으로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장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민간보험회사가 국가가 운영하는 국민건강보험을 대체하도록 하고 영리법인 의료기관을 허용하여 사적 성격이 강화된 의료기관들과 민간보험회사들 간의 자율계약을 통해 의료서비스의 비용과 질 등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의료체계의 민영화를 추진하려는 것이다.국민건강보험 총 진료비가 40조원 대인 현 규모에서 25%의 시장점유율을 확보하는 보험회사는 10조원의 매출 증가가 가능하고 순익률 10%일 경우 1조원이 남는 장사를 할 수 있다. 국민건강보험 진료비의 연평균 증가율이 10% 이상 수준인데 민영화 이후 그 기울기가 더욱 가파르게 상승할 것이고 그 규모는 엄청나게 커질 것이다.이 과정에서 민간보험회사와 병·의원에 대한 자본투자를 통해 고용이 증가하고 복잡한 민간의료보험 서비스 관행의 원활한 관리와 운영을 위한 추가적 고용도 크게 늘어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약 의료비가 전년 대비 10조원 증가하면 최소 GDP 1% 추가 성장이 현실화된다.이러한 맥락에서 작금의 의료 민영화 추진 주체들이 의료이용의 양극화와 그로 인한 비극의 양산쯤은 국가경제의 지속 성장과 고용 확충 자본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감수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의료 민영화의 요체를 수익에 눈이 먼 보험회사들과 그 입김에 놀아나는 신자유주의 정권 때문이라는 수준으로 단순화시켜 이해하면 곤란하다. 현 정부의 의료 민영화 기도는 반드시 저지되어야 한다.그것은 정의롭지 못한 길이며 사회가 분열되고 국민이 고통을 겪는 길이기 때문이다. 의료서비스 산업화의 외피를 둘러쓴 이명박 정부의 의료체계 민영화 추진은 정확하게 타격하되 한국 자본주의 발전 단계에서 의료서비스 산업 육성을 통한 지속성장의 기반 구축이 불가피한 국면에 있다는 사실은 직시할 필요가 있다.그러면 의료서비스 산업의 육성을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 문제는 방법이다. 역사적 경험을 돌이켜보면 자본과 시장의 논리가 주도하는 방식이 오른편에 있다면 그 왼편에는 복지국가의 길이 있다.하지만 우리 현실에서 두 대립담론의 균형은 한쪽으로 심하게 치우쳐져 있다. 당장의 우리네 의료 민영화 담론 구도만 보더라도 진보진영은 국민의료비의 앙등과 민간보험사의 횡포에 기초한 잠재적 불안을 자극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국민 누구에게나 차별 없는 의료서비스의 이용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의료 인력을 크게 확충하여 의료서비스의 질을 높임으로써 의료이용의 만족도를 제고하고 내수경제의 진작과 경제성장도 함께 도모할 수 있는 역동적 복지국가의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현 정부와 자본이 추구하는 길을 단순화시키면 민간보험사와 영리병원을 통해 자본을 조달하고 이들의 영업활동을 통해 고용을 창출하는 방식이다.복지국가를 통한 길도 기실 이와 유사하다. 다만 자본시장을 통한 사적 투자가 아닌 세금을 비롯한 공공기금을 활용한 재원조달과 공적 투자로 공공 부문이 중심이 된 고용창출과 경제성장이라는 점이 핵심적 차이다.이를 위해서는 의료서비스 산업화를 위한 공적 투자 재원 마련 방안과 의료 인력 확충의 세밀한 밑그림이 제시되어야 한다. 우선 재원조달 방안부터 살펴보면 조세제도의 개편을 통한 세원 확충이 필요할 것이다.일정한 수익률을 정부가 보증하고 국민연금기금을 의료산업에 투자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500병상 병원에 추가로 필요한 인력의 규모가 얼마이고 이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얼마를 보상할 것인지 의원급을 중심으로 한 1차 의료의 인력풀은 어떻게 확충하고 얼마나 보상할 것인지 등에 대한 구체적 대안을 마련하여 역동적 복지국가의 담론과 정책으로 삼각동맹의 의료 민영화 기도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시급하다.물론 이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현 정부와 자본이 의료서비스 분야에 돈(국민의료비)을 더 쓰겠다고 작심을 한 이상 발상의 전환을 하자면 역동적 복지국가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열린 셈이다.왜냐하면 역동적 복지국가가 추구하는 의료서비스 산업화의 길이 이명박 정부의 삼각동맹이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의료산업화의 길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며 지속가능할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 편에서 보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공평하고 이득이 크기 때문이다.이제 결론은 우리가 신자유주의 의료 민영화에 대응하는 역동적 복지국가의 의료산업화 담론과 구체적 정책을 민주주의의 광장 한 복판으로 제대로 끌어낼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
2024-01-19우리는 87년 민주항쟁으로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를 얻었고 한국 민주주의의 내용적 발전 가능성을 굳게 믿었다. 그리고 장차 모든 국민이 더불어 잘 사는 민주공화국 참으로 행복한 나라를 꿈꾸었다.김영삼 정부에 들어서서 1994년부터 본격화된 세계화 논의 국민의 삶의 질 향상과 세계적 표준 주창 그리고 OECD 가입으로 우리나라는 박정희의 파쇼적 발전국가체제가 낳은 경제적 성과를 딛고 세계화된 새로운 자본주의 국가발전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1997년 금융위기는 순식간에 찾아왔고 경제위기의 고통은 서민과 중산층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였다. 바야흐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국의 경제사회체제는 박정희식 경제발전모델이 종언을 고하고 시장만능주의로 넘어간 것이다.1998년 김대중 정부 이후 지난 10년 동안 우리 사회는 누가 보아도 명실상부한 시장만능주의 신자유주의 양극화사회로 구조화되어 버렸다. 한나라당은 이 시기를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르며 좌파정부의 무능을 꾸짖고 정부와 범여권은 이를 외환위기 극복과 세계화 시대의 새로운 발전을 이룩한 발전의 10년이라며 한미 FTA의 체결과 함께 온갖 종류의 경제지표를 들이대고 있다.둘 다 틀렸다. 지난 10년은 양극화 성장체제가 안착되고 구조화되어 버린 ‘한국 신자유주의 사회경제체제의 불안정성과 국민 불안 심화’의 10년이었다. 지금 국민 대다수는 불안하다. 그것도 만성화된 불안이고 때로는 절망이고 분노다. 그래서 자살률이 세계 1위다. 우리는 그런 불안의 시대를 살고 있다. 소위 5대 불안이 그것이다.첫째, 일자리 불안이다. 대학을 졸업해도 좋은 일자리 얻기가 어렵다. 그러니 공무원이 되기 위해 고시열풍에 휩싸여 있거나 의학전문대학원/법학전문대학원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아마 공부 잘 하는 사람들은 죄다 이리로 가는 모양이다. 일자리를 얻은 사람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고용불안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번 잘리면 그것으로 인생이 끝장난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직업교육과 평생교육체계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잘릴 염려가 없는 직업을 구하거나 해고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저항해야 한다. 고용은 경직되고 도전정신과 창의성은 줄어들고 일자리 불안은 심화된다. 일자리와 관련하여 우리나라에서 특히 심각한 것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다.우리나라에서 중소기업의 고용 비중은 2004년 현재 약 87%로 1999년의 약 82%에 비해 그 비중이 점차 높아지고 있으나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생산성과 임금 격차는 더 커지고 있다.대기업 대비 중소제조업의 생산성은 1994년 43.2%였으나 2004년에는 31.3%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고스란히 임금격차로 이어져 1995년 대기업 대비 중소기업의 월평균 임금수준이 76.3%였던 것이 2005년에는 64.3%로 떨어졌다.경제구조의 이러한 양극화와 양극화 성장체제가 일자리 불안의 근원이다. 더불어 사회적으로 새롭게 필요한 부분에서 양질의 사회적 일자리를 적극적으로 창출해야 하겠으나 신자유주의의 작은 정부 논리에 사로 잡혀 이 부분의 일자리 창출이 기대에 크게 못 미치게 된 것도 일자리 불안의 한 원인이 되고 있다.2003년 현재 OECD 국가들의 사회서비스 고용 비중을 보면 노르웨이 34.2% 덴마크 31.3% 핀란드 27.3%였고 OECD 평균이 21.7%이었으나 우리나라는 12.6%에 그쳤다.둘째, 보육 및 교육 불안이다. 우리나라는 특히 교육에 대한 열망이 높다. 개천에서 용 나게 하겠다는 우리네 부모의 오래된 욕망 탓이기도 하겠다. 그러나 이제 개천에서 용 나기는 어렵고 보육과 교육에 대한 불안만 가중되고 이것이 세계 최고의 ‘아이 안 낳는 나라’로 귀착되고 있다.2005년 현재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1.08명으로 스웨덴의 1.9명에 비하면 거의 절반 수준이다. 저출산의 가장 큰 원인은 ‘경제적 부담 또는 소득과 고용의 불안정’이다. 보육의 공공성이 높은 북유럽 나라들 특히 스웨덴의 보육료 정부 부담비율은 80%를 상회하는데 비해 우리나라는 2007년 현재 약 46% 수준이다.우리나라 보육시설의 공공성(국공립보육시설)은 시설 수 기준으로 5.2% 아동 수 기준으로는 11.3%에 불과한 실정이다. 유럽 선진국들은 공교육체계 덕택에 가계의 교육비 부담이 거의 없으나 우리나라는 서민가계를 불안과 고통과 절망으로 내몰고 있다.국내 사교육 시장의 총 규모는 명목 GDP의 3.95%에 해당하는 33조 5000억 원으로 추정되었는데 이는 2007년 정부의 교육 예산 총액 31조 원보다도 많은 것이다.교육은 지식경제 사회에서 성장 동력이 되는 인적 자본의 확충뿐만 아니라 사회정의의 기본적 요소인 기회의 평등이란 차원에서도 사회구성원 모두에서 공평하게 보장되어야 하는 공공재다.그런데 우리나라는 보육과 교육에서 공공성이 극히 취약하고 가계 부담의 크기가 큼과 더불어 양극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어 중산층을 포함한 대다수 국민들의 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셋째, 주거 불안이다. 최근 수년 간의 집값 오름세로 서민들의 내 집 마련 가능성은 점차 낮아지고 내 집 마련에 걸리는 기간은 더 길어지고 있다. 집이 주거공간이라기 보다는 자산증식의 수단으로 간주되고 있는 독특한 우리나라 주택 문화 하에서 주거불안은 상대적 불안과 절대적 불안으로 중층적인 성격을 띤다.내 집을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 간 좋은 집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의 차이에서 오는 불안감과 절대적으로 저열한 주거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 또는 그럴 가능성에 내몰리고 있는 사람들의 절대적 주거불안이 그것이다.건설교통부의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체 가구 중 16% 가구 수로는 255만 가구가 최저주거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최저주거 기준 미달가구 중에서도 최하층인 주거극빈층이 있는데 이들은 지하방 옥탑방 판잣집 비닐집 움막 등에 살고 있는 계층으로 68만 가구 160만 명이 이에 해당한다.우리나라 국민들의 강력한 내 집 마련 욕구는 차치하고라도 공공임대주택 정책 등의 공공주거정책을 통해 서민과 저소득층의 주거불안을 우선적으로 해소해 주어야 하겠으나 2006년 말 현재 한국의 임대주택의 비율은 전체 주택의 9.8%에 그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장기공공임대주택은 3.0%에 불과한 실정이다. 중산층의 어느 가계라도 처할 수 있는 주거불안에 대한 사회적 제도적 안전망은 우리나라에서 극히 미약한 것이다.넷째, 노후 불안이다.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2007년 현재 약 10%이고 2018년이면 14%로 고령사회로 진입한다. 이제 노후 문제는 대상인구가 크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 전체의 심각한 대응 문제임과 동시에 개별 가계에게는 큰 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2004년도 전국 노인생활실태 및 복지욕구조사에 의하면 노인 중 13.9%가 공적연금을 8.6%가 국민기초생활보장으로부터 급여를 받고 있고 노인의 78.6%가 사적 이전소득에 의존하고 있다. 이것이 노후 불안의 근본적 원인이자 서민가계의 큰 불안과 분란의 이유가 되고 있다.빠듯한 서민 가계에서 어른을 봉양하고 용돈을 드려야 하는데 이것이 안정적으로 가능한 가계가 얼마나 되겠는가? 내년부터 65세 이상 노인 70%에게 기초노령연금을 지급한다고는 하나 최고 금액이 8만 4천 원 정도에 그치므로 노후 불안을 잠재우는 데서 실효성은 거의 없을 전망이다.생색내기용 기초노령연금이 아니라 모든 노인에게 기초생활이 가능한 최저생계비(2007년 현재 약 46만원)에 근접하는 금액을 지급하는 실질적 기초연금제도가 작동하는 국민연금제도의 개혁이 없는 한 노후불안 문제는 장차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다섯째, 건강 불안이다. 2007년 2/4분기 가구 당 월평균 의료비 지출액은 12만 1600원으로 전년 대비 13%가 증가하였는데 같은 기간에 소득은 약 6%만 증가하였으므로 의료비 지출액 증가율은 소득 증가율의 2배를 초과한 셈이다.현재 우리나라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전체 의료비 중 건강보험이 부담하는 부분의 크기)은 64.3% 수준인데 유럽 선진국들의 대부분이 85-90%인 것에 비하면 아직은 낮은 수준이다.식구 중에 누가 큰 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이라도 하게 되면 온 가족이 초죽음이 된다. 경제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간병시스템의 미비도 대한민국 일반적 가계가 겪는 건강불안의 한 원인이다. 설상가상으로 가계의 생계를 책임지던 가장이 큰 병에 걸릴 경우 서민 가계는 몰락을 피할 길이 없게 된다.본인부담 의료비는 물론이고 질병으로 인한 소득상실을 보상할 아무런 제도(상병수당)가 없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나머지 4대 불안은 자동으로 작동된다.이러한 불안이 서민가계로 하여금 무리하게 각종 민간의료보험과 생명보험 등에 가입하도록 몰아가고 하루하루의 힘겨운 민생과 각종 불안이 뒤범벅된 안타까운 우리네 일상을 연출하게 한다.그런데 문제는 더 큰 데 있다. 우리 국민들의 불안에 대한 사회심리가 그것이다. 불안함에도 스스로는 그것을 불안으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애써 숨기려 한다는 사실이다.내가 처해 있는 처지 즉 신자유주의 한국 사회의 불안정과 불확실성 등은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처해있는 환경이므로 이를 하나의 조건으로 당연히 받아들이려 하기 때문이다.보편적 복지체제가 없어도 능동적 복지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지 않아도 우리나라 경제체제가 그리 공정하지 않아도 사회정의의 수준이 높지 않아도 이를 불만거리로 삼기보다는 유능하고 경쟁력 있는 개인이 되는 길을 선택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불안이 사회적 문제로 공론화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문제로 파편화되어 개인의 정신과 신체와 개별적 삶에 내재화된 채로 만성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비극적인 악순환을 하게 된다.불안이 개별적 삶에 내재화된 국민들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 사고 기껏해야 가족주의에 매몰되는 이기적 삶을 고수하려 한다는 점이다.이타심 공동체적 관심 인간의 존엄 사회적 연대 사회정의 등의 가치로부터 점차 멀어지는 그리고 시장만능주의의 가치에 종속되는 사회적 상황이 도래하는 데 이것이 바로 사회 전반의 보수화를 설명해주는 국민 불안의 사회심리다.이런 방식은 문제의 해법이 아니다.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악순환의 고리를 따라 더 큰 불안으로 내몰릴 뿐이다. 이제 우리는 불안을 개인의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리고 정치적 의제로 삼는데 주저해서는 안 된다.왜냐하면 이 문제는 애초부터 정치적 문제였다. 불안의 본질적 이유는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신자유주의 사회?경제 구조와 잔여적 복지제도 탓이기 때문이다.즉 1997년 이래로 신자유주의 경제사회정책 10년을 거치면서 경제구조가 양극화되었음과 동시에 복지체제는 과거의 미흡한 영미식 잔여/선별주의를 고수함으로 인해 보편주의 복지체제가 가져다주는 기회 균등과 사회적 안정성 구조와 이로 인한 인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의 더 나은 축적 기회를 놓쳐 버렸고 이로 인해 국민 개개인 차원에서는 삶의 전반적인 불안정성이 커지게 되는 바 이것이 종합적으로 작동하여 민생을 불안하게 만든 것이다.문제의 해법은 ‘불안의 원인은 우리나라 신자유주의 사회경제체제에 있다’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이를 사회적 의제로 만들고 국민적 요구를 조직하는 것이다.이를 위해 학계 시민사회단체 개혁적 진보정치세력이 함께 나서야 한다. 통합적 협력적 방식으로 우리사회의 보수화 추세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불안이 국민 개별적 보수화의 사회심리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수준에서는 진보와 개혁을 향한 역동적 변화의 에너지임을 우리는 잘 알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하기에 달린 것이다. 먼저 시작하고 함께 나가자.
-
▲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출처=위키백과)한나라당이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그들이 뭘 잘 해서가 아니라 범민주진영이 워낙 못한 탓이었다. 광범위한 민심이반이었다. 압승한 한나라당 정권이 출범한 지 이제 겨우 한 달이다.그런데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염증이 지난 참여정부 5년에 걸쳐 일어났던 것에 버금가는 듯하다. 국민의 실망과 염증은 곧 광범위한 민심이반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그러나 이번 총선에서 허탈한 민심을 받아 안아줄 대안이 있는가? 준비된 국가비전을 제시하는 대안 정치세력이 있는가 말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우리는 역동적 복지국가로 가야하고 중산층을 포함한 도시서민과 노동자 농민 등 온 국민이 모두가 행복한 복지국가를 꿈꾸건만 이를 이루어낼 선도적 정치세력은 어느 곳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이것이 작금의 우리나라 정치현실이다. 한나라당이 계파싸움과 공천갈등 내분 때문에 지리멸렬로 치닫고 있어도 그래서 정당 지지율이 떨어져도 통합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범 민주 또는 진보정치세력의 정당 지지율은 좀처럼 오르지 않는다.명망성과 개인기가 뛰어나거나 이미 지역의 정치토호나 기득권세력으로 깊이 뿌리를 내린 일부 범야권 정치인들이 지지율 선두를 달리고 있을 따름이다.이번 총선의 투표율은 사상 최저가 될 전망이다. 한나라당이 못마땅해지고 있음에도 어느 정치세력도 한나라당의 대안이 될 실력 있고 믿음을 줄 수 있는 세력으로 국민적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먼저 통합민주당을 보자. 법률가인 박재승 공심위원장의 혁혁한 공로로 죽어가던 통합민주당이 다시 살아났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생명의 연장만을 보장받았을 뿐이었다.국민 누구도 통합민주당을 한나라당을 대신할 수권정당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한 이유로 다수의 국민들이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에 실망하면서도 통합민주당을 선뜻 지지하지 못하는 것이다.최근의 여론조사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번 통합민주당 공천의 최종 결과를 살펴보자. 모든 언론이 하나같이 ‘용두사미’라고 평가한다. 처음 시작은 신선하고 좋았으되 최종 결과는 실망이라는 뜻이다.공천심사위원회가 법의 잣대를 엄격하게 들이대는 일은 잘 하였으나 통합민주당이 장차 만들고자 하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밝혀줄 어떤 국가비전도 제시하지 못하였고이에 적합한 유능한 인물을 공천하지도 못하였다. 한나라당이 계파공천 나눠먹기 공천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은 당연하겠으나 기실 공천자 인물의 면면을 보면 질적으로는 한나라당보다 못한 공천이었고 역동적 복지국가의 비전을 기대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모자라는 인물들로 가득 찬 공천 도로 열린우리당 잡탕 공천이 되고 말았다.다시 한 번 이념적 성향 상 파노라마 공천이 된 것이다. 이런 인물들이 당선된들 이들을 데리고 어찌 강력한 야당 대안적 수권정당을 만들 수 있겠는가?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국민들에게 주는 실망도 이에 못지않은 수준이다. 진보진영 내부적으로는 불가피한 논쟁이었겠으나 국민들에게는 자기들만의 용어로 싸워대는 운동권 정당의 초라한 모양세가 가히 목불인견이었다.고작 지지율 5%에 불과한 소수 정당이 집안싸움에 몰두하다 집을 두 쪽 낸 세력들에게 골고루 잘했다고 표를 나눠 몰아줄 국민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무엇보다 기가 막히는 것은 기존 민주노동당을 둘로 나누었으되 제살 뜯어먹기 식으로 세력을 분할하였을 뿐 대중정당으로 국민정당으로 대안적 수권정당으로 거듭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아직까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늘 보던 그 얼굴에 그 얼굴이고 그 나물에 그 밥인 것이다. 이래서야 마이너리그 운동권 그들만의 정당 그들만의 잔치가 계속될 따름이다. 여전히 민주노동당은 주사파 정당으로 진보신당은 고루한 PD파 정당으로 존속할 것인가?국민들은 새로움 현재의 민생에 드리운 지속적 불안을 없애줄 새로운 계기 새로운 제도 새로운 사회를 원하고 있다. 통합민주당은 국민이 원하는 그 새로움이 무엇인지 도대체 전혀 모르고 있다.그들의 인식은 신자유주의의 제도적 틀에 갇혀 있으며 기실 이명박 정부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번에 공천된 후보들이 총선에서 아무리 많이 살아 돌아온들 신자유주의에 지친 척박한 국민의 삶과 만성적 불안의 해소에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어떤 희망이 되겠는가?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지역구에서 각각 1-2석을 비례대표에서 1-3석을 얻는다 한들 이것이 민생과 국민의 희망에 무슨 큰 소용이 되겠는가?이들 중 누구도 어느 정치세력도 한나라당을 대체할 수권정당이 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는 동일하게 ‘희망 없고 의미 없는 정치세력’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권가능성과 수권능력이다. 권력의 획득을 가시적 목표로 인식하지 못하는 정당은 이미 유효한 정치세력이 아니다. 불임정당이기 때문이다.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5년 후의 수권정당으로 보는 국민은 거의 없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아무리 사고를 치더라도 현재의 통합민주당이 5년 후에 집권당이 되리라고 보는 사람도 극히 드물다. 현재의 범야권으로는 수권가능성이 거의 희박하다는 소리다.설사 지금 상태에서 집권을 한다한들 통합민주당이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보다 국정운영을 더 잘할 것으로 보는 국민도 별로 없을 것이다. 이 파노라마 잡탕정당으로는 참여정부의 혼란만을 재연할 따름이지 그 어떤 이념적 확신도 정책적 새로움도 보여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이 집권을 했다한들 이들이 그들의 이념과 정책대로 집권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으리라 보는 국민은 거의 없다.지금으로서는 이들 범야권 정당들 모두가 제대로 된 이념과 국가비전을 가지고 있지도 못할뿐더러 그들의 정책으로 국정을 제대로 운영할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도 못하기 때문이다.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지속적인 신자유주의 정책 추구와 그 결과로서의 양극화 심화 민생의 어려움 국민 불안의 가중은 소위 10%의 상위계층을 제외한 중산층을 포함한 온 국민의 고통 심화로 귀결될 공산이 크다.이러한 조건에서는 5년 후를 대비한 의미 있는 집권 계획이 절실하다. 신자유주의를 맹신하는 범 보수정치세력에 대항하는 범 민주 진보세력의 새로운 정치구상이 필요하다.역동적 복지국가를 중심에 놓고 ‘자유주의진보 정치세력’ ‘사회민주주의 정치세력’ ‘민주사회주의 정치세력’과 ‘시민사회와 학계의 범 진보개혁세력’까지 포괄하는 한국적 정치실험이 필요하다.여기서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봉건적 정치이념이나 교조적 국가사회주의 정치이념이 이러한 한국 사회의 민생과 복지국가 요구에 부합하는 새로운 정치지형의 창출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해야 함은 물론이다.감히 단언하건대 지금 범야권에 펼쳐져있는 정치 지형과 틀은 단지 전환기에 불과하다. 새로운 정치질서의 창출 과정에서 어쩌면 꼭 거쳐야 하는 성장통의 과정이라고 인식하는 지혜로운 자세가 필요하다.세상에 고정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변화한다. 오직 역동적 복지국가를 향한 국민적 요구와 시대적 필연 그리고 이를 향한 새로운 정치의 진전만이 변하지 않고 지속될 뿐이다.이번 총선이 아무리 실망스러운 결과를 낸다고 한들 모든 복지국가 세력이 실망하지 말고 끊임없이 전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 병원간호사회 로고(출처=병원간호사회)요즘 병원들이 간호사 구하기가 꽤나 어렵다고 한다. 간호사를 못 구해서 병원 문을 닫을 판이라는 불평까지 터져 나오는 실정이다. 일부에서는 60년대 우리나라 간호사들이 병원 취업을 위해 독일로 갔던 것처럼 동남아 국가들에서 간호사를 수입해 오자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이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간호사 구인난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 전체 간호사 면허소지자 중 취업자의 비율이 절반에도 못 미치는 상황에서 동남아 간호사 수입은 그리 좋은 대안이 되지 못한다.이미 공급된 간호사들이 현업을 기피하고 있는 현실에서 가장 바람직한 처방은 이들이 다시 병원 업무에 복귀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서울을 중심으로 수도권 대학병원들의 병원 신증설을 통한 대형화 고급화 경쟁으로 수도권 대형병원들의 간호사 수요가 급격하게 증가한 것이 간호사 인력난을 유발한 결정적 계기였다. 이미 최근 5년 동안 서울 인근에만 거의 1만 병상이 증설되었다.최근 들어서는 700병상 규모의 삼성서울병원 암센터 개원을 비롯하여 수도권 대형병원들의 신·증축이 마무리되면서 간호사 수요가 급격하게 늘었고 이들 병원들이 신규 간호사보다는 경력직 간호사를 선호하는 탓에 중소병원 지방병원의 간호사들이 대거 이동하면서 인력난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서울 아산병원 리모델링 완료 후 1000병상 증설 1200병상 서울성모병원의 신규 개원 등 대규모 신증축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지속될 전망이다.이처럼 중소병원 지방병원 간호사들이 서울의 대형병원으로 몰려드는 이유는 중소병원과 대형병원 간 서울병원과 지방병원 간의 임금 격차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이런 저런 정보를 종합해 보면 입사 초기에 많게는 연봉 천만 원 정도까지 차이가 나고 경력이 붙을수록 격차는 더 벌어진다고 한다.여기에 서울이라는 보다 나은 생활여건마저 보장되니 20대 젊은 여성들이 서울 소재 대형병원에 일자리만 나면 몰려드는 게 당연한 현실이다. 고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간호사 부족 문제를 보다 세밀하게 정의하면 동일 업종 간 규모와 소재지에 따른 심각한 임금 격차에서 비롯되는 (지방)중소병원의 인력난이라고 할 수 있다.지금과 같이 임금 격차가 크게 벌어진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임금 격차를 유발한 초기 동력은 병원사업장 내 민주노조의 존재 여부였다. 87년 6월 항쟁 이후 병원사업장에 등장한 민주노조의 활동성과가 축적되면서 민주노조가 존재하는 병원과 그렇지 않은 병원 간에 노동조건의 격차가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이다.물론 노조 신설을 타 사업장으로 확대하려는 노동운동 주체들의 움직임은 지속되어 왔지만어느 시점부터는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하게 되었고 노조활동의 성과가 일부 사업장에만 국한되기 시작한 것이다.보건의료의 공공성 강화와 환자 권익의 확대를 주장하는 병원노동자의 단체행동에 대해 일반 대중의 반응이 시원찮아진 것도 이러한 현상과 일정하게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그리고 지금과 같이 병원 간 차이를 보다 심화시키고 있는 최근의 유력한 동력은 재벌병원이 추동하고 있는 병원 간 경쟁심화에 따른 대형화 고급화 추세다. 병원서비스라는 것이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즉 서비스 차별화를 위해서는 인력이 많아야 한다.재벌병원의 경우 초기부터 기존 병원보다 사람을 많이 썼다. 이로 인한 인건비 과잉과 초기 적자를 감수해가면서까지 서비스 차별화 전략을 펼친 것이다. 그리고 이게 제대로 먹혀들었다. 기존 병원과 별 차이 없는 건강보험 진료비를 받으면서도 보다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여기로 가지 않을 환자가 어디 있겠는가?이 과정에서 재벌병원들은 우수인력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서 다른 병원에 비해 좋은 조건을 제시해 왔는데 이러한 움직임이 고용시장에 상당한 파급력을 행사하고 있다.이제는 병원 경영진이 노조의 요구가 아니더라도 재벌병원 대비 일정한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 재벌병원이 제시하는 노동조건을 가이드라인 삼아 쫓아갈 수밖에 없는 시장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이 과정에서 약한 고리인 (지방)중소병원이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고 재벌병원의 환자 독과점 의료인력 독과점 현상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지금 벌어지고 있는 중소병원의 간호사 구인난의 이면에는 재벌병원이 주도하는 일종의 치킨게임이 작동하고 있다. 위기에 처한 병원이 많을수록 재벌병원으로의 환자 유입 가능성이 많아지고 기존 병원시장의 재편 또한 수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병원협회에서 주장하고 있는 간호학과 정원 확대는 인력난 해소에 다소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만 중소병원 간호사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대형병원과의 격차를 고려할 때 문제해결의 근본적 처방이 되기는 어렵다고 판단된다.또한 개도국 간호사 수입의 경우 당장에 실현 가능성이 낮기도 하지만 수입된 인력이 인력난에 허덕이는 중소병원에 집중되면서 스스로 ‘질 낮은 병원’이라는 낙인을 찍어 질 경쟁에서의 도태를 자처할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현재 벌어진고 있는 중소병원의 간호사 부족사태는 단순한 인력부족에서 비롯되는 문제가 아니다. 개별병원 내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조합의 일상적 활동이 문제를 증폭시키는 측면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재벌병원의 시장 독과점 강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사안이다. 이 문제를 제대로 풀기 위해서는 병원 노동조합이 노동문제를 중심으로 보건의료의 사회적 대타협을 이끌어 낼 필요가 있다.OECD 선진국 대비 20%에도 못 미치는 병원 간호 인력의 확대를 통한 의료서비스 질 향상과 병원 규모와 소재 지역에 따른 병원 노동자의 노동조건 격차 해소가 핵심 방향이 되어야 할 것이다.정부는 병원 간호 인력 확대를 통한 일자리 창출과 이를 통해 내수 활성화라는 이득을 얻고 사회적 대타협에 따른 제도의 안정적 운용과 간호 인력 확대에 따른 비용 증가를 정치적으로 행정적으로 세련되게 풀어낼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또한 병원들은 고용 확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병원 간 노동조건의 격차 해소에 소홀함이 없어야 하며 확충된 인력을 활용한 의료서비스 질 향상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노동조합은 병원의 규모별 소재지별 노동조건 격차 해소를 위한 합리적 대안을 제출하고 이의 이행에 따른 부담을 감내해야 하며 대신 병원 인력 확충에 따른 노동조건 개선 및 고용안정 그리고 산별협약의 체결과 이의 실행에 따른 노동문제의 개선을 성과로 얻어내야 할 것이다.여기서 관건은 노동조건의 격차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의 문제다. 노조가 존재하는 사업장의 임금을 줄여가면서까지 타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필자의 판단으로는 OECD 선진국들의 임금 수준을 고려하건데 대형병원의 인건비 상승 속도를 최소화하고 중소병원 인력의 노동조건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단계적으로 향상시켜나가는 게 유일한 해법이지 싶다.그리고 이 과정에서 비정규직 차별 해소가 전제되어야 하며 유휴 간호 인력의 활용을 위한 고용 형태의 다양화도 모색해 보아야 한다.이와 관련하여 기존의 조직 노동자들이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을 것이란 점을 잘 안다. 그리고 노조가 결의를 모은다고 해서 정부와 병원 자본이 쉽게 양보할 것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노동이 뒤통수 맞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그러나 현재 병원 노동자를 둘러싼 여러 정황과 재벌병원을 중심으로 한 대형병원의 독과점 강화가 의료민영화의 주된 동력이 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다른 방법이 잘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하는 소리다. 그리고 결과는 노동의 정치력에 달려 있다.
-
▲ 사진출처=픽사베이지난 일요일 오후 필자는 연구실에서 학술대회 발표 원고를 준비하느라 골몰하고 있었다. 사실 원고 제출기한에 심리적으로 쫓기고 있던 터였다. 순간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의과대학 졸업반 학생 한 명이 불쑥 들어오며 인사를 한다. 반갑게 맞이하고는 차를 대접하였다.의과대학의 경우에는 학생들이 개인적으로 그것도 일요일 오후에 교수 연구실을 찾아오는 일이 거의 없는데 다소 의아스럽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수업시간에 교수와 학생 중의 한 명으로 대면한 것 이외에는 처음 마주하는 것이었다.그때 순간적으로 필자의 머리를 스치는 단어는 ‘소통’이었다. “아 내가 학교에서 학생들과 너무 ‘소통’ 없이 지냈구나!”라는 반성의 마음도 살짝 스치듯 생겨났다. 그러면서 이내 “내가 너무 바빴으니까”라는 핑계로 ‘소통의 부재’를 스스로에게 변명하곤 금방 잊어버리려 했다.이어 필자는 “본과 4학년 학생이라서 이제 의사 국가고사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공부는 잘 하고 있느냐?”고 의례적인 질문을 던졌다. “예”라고 대답한 그 학생이 살짝 한 번 웃더니 말을 꺼냈다. “이건 다른 이야기인데요 우리 의대 본과 4학년에서 의대 교수님들 중에서 최고의 교수를 투표해서 뽑았는데요. 교수님이 1등으로 뽑혔어요.”그때 필자는 그게 뭔지도 잘 모르겠고 별 관심을 가지고 싶지 않아서 애써 무시하면서 그런데 왜 왔냐고 물으며 화제를 돌리려 했다. 그럴 즈음에 그 학생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2년쯤 전에 교수님이 저희 반에 와서 잠시 강의를 하고 가셨는데 그때는 학생들이 교수님에 대해서 굉장히 반발했었어요.그런데 지금은 학생들 마음이 많이 우호적으로 돌아선 것입니다. 이제는 많이들 좋아해요” 필자는 그때서야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2년쯤 전 강의에서 학생들이 필자에게 크게 반발하였다는 지점 때문이었다. 그 학생이 돌아가고 잠시 동안은 학술대회 발표 원고 쓰는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2년쯤 전을 거슬러 필자가 무슨 강의를 했던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의료전문주의’에 대해 2시간 정도 강의하면서 우리나라 의료의 현실과 의사들의 행태를 비판적으로 강의했던 기억이 났다. 그 강의를 하던 과정에서 필자가 한국 의료계와 의사들을 더러는 심하게 비판했던 모양이다.장차 의사가 될 의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신들의 미래이자 현재의 동일시 대상인 한국 의사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내용이 포함된 두 시간짜리 강의를 하고는 나가버린 초면의 어떤 좌파 교수에 대해 당시 학생들의 마음이 꽤 상했던 모양이었다.그리고 거의 2년 반이 지난 올해 9월에서야 필자는 다시 이 학생들에게 약 20시간의 강의를 하게 되었다. 약 2주에 걸쳐 진행된 20시간의 집중적 강의는 결코 짧은 것이 아니었다. 필자는 강의실에 서면 주저하거나 거침없이 필자의 생각과 있는 모습 그대로를 곧잘 드러내는 편이다.그래서 필자가 운동권 출신이고 좌파라는 것을 학생들이 다 안다. 필자의 생각과 색깔은 드러내 놓되 강의의 내용에서는 좌우의 주장 의료를 둘러싼 시장주의자들과 공공주의자들의 견해를 모두 들려주려 애쓴다.무엇이 옳은 것 같은지 그 선택은 고스란히 학생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 20시간의 강의는 필자가 최선을 다해 학생들과 ‘소통’을 시도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2년 반 전에 필자가 했던 2시간짜리 강의는 왜 그토록 제자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을까? 필자의 강의에 임하는 열정이 부족해서일까?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필자의 강의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2시간이라는 지극히 짧은 시간에 일방적으로 내뿜은 한국 의료계의 행태를 비판하는 필자의 열정적 강의가 장차 의료계의 일원이 될 의대 학생들에게는 강의에서 분출된 열정의 크기만큼이나 크게 반발심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한국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을 열거해보라고 하면 어떤 집단이 주로 거론될까? 아마 법조계 경제계 등과 함께 우선순위로 의료계가 거론될 것이다. 사실 의료계는 최근 몇 차례의 대선에서 한나라당을 공식적으로 지지하였다.대한의사협회장을 지내셨던 분은 현직 한나라당 지역구 국회의원이고 그 외에도 한나라당에는 의사 국회의원이 두 분 더 계신다. 다른 정당에는 의사 국회의원이 한 명도 없다. 이것 말고도 우리나라 의료계의 보수성은 여러 곳에서 증명된다.정부가 조금이라도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하려 하면 똘똘 뭉쳐 막아낸다. 1990년대 중반 정부가 추진하려했던 주치의제도도 의사들의 반대로 결국 무산되었고 그 후에도 간간히 정책의제로 거론되었지만 대한의사협회의 반대로 본격적인 논의는 이루어져 본 적도 없었다.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시장만능주의 방식의 보수지불제도인 ‘행위별수가제’가 과잉진료를 유발하고 자원 낭비적인 제도이므로 단계적으로 그 비중을 줄여나가면서 포괄수가제와 인두제 등의 다양한 보수지불방식으로 대체해 나가고 있는데 비해 유독 우리나라만 굳건하게 ‘행위별수가제’를 사수하고 있다. 의료계가 다른 보수지불방식을 도입하는 데 사생결단으로 반대해 왔기 때문이다.실제로 참여정부 초기에 오래 전부터 시행이 예정되어 있던 일부 포괄수가제 항목의 강제 실시가 의료계의 집단행동으로 무산되었고 지금까지도 아무런 진전이 없다.2000년에 실시된 의약분업은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제도이고 이미 제도의 정당성이 입증된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나라 의료계는 이 제도를 의료사회주의라고 매도하고 있다.국민건강보험제도는 미국의 민간보험 형 의료제도에 비해 월등한 의료제도다. 많은 국민들이 이를 인정하고 있고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이 보다 튼실해지길 바라고 있다.그런데 의료계는 이 제도를 의료사회주의라고 낙인 찍어놓고는 허물고 싶어 한다. 실제로 틈만 나면 공격한다. 건강보험 요양기관 당연지정제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그 중의 하나다.그리곤 민간의료보험의 활성화를 주장한다. 민간의료보험이 활성화되면 국민건강보험이 위축되고 궁극적으로 제 기능을 상실하게 되면 의료계에 유리한 더 많은 시장 환경이 허용될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의과대학 본과 4학년은 이제 몇 개월 후면 의사가 된다. 그리고 인턴이 되고 레지던트가 되고 세상에 나와 환자를 진료하게 된다. 그런 의대 본과 4학년 학생들이 올해 9월 상반기에 20시간의 강의를 한 적이 있는 좌파 교수에게 2년 반 전에는 굳게 닫혀 있었고 크게 반항심을 가졌던 바로 그 마음의 문을 열어주었다는 소식이었다.그 학생이 들려준 이 소식은 필자에게 ‘소통’의 중요성을 다시금 가르쳐준다. 2년 반 전의 두 시간은 소통하기에 너무 짧았고 또 강의시간이 짧다는 이유로 학생들과의 소통을 시도하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필자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을 것이다.반면 올 9월의 집중적 20시간은 꽤 긴 시간이고 소통하기에 좋은 여건이었을 것이다. 이에 더해 필자의 ‘소통’ 시도가 좀 더 부드러워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소통’은 시도 자체만큼이나 태도와 방법도 중요하니까 말이다.이제 필자와 ‘소통’한 제자들 이들 세대가 장차 의료계의 신진세력이 되어 있을 무렵에는 우리나라 의료계가 뭔가 많이 달라지길 기대한다. 더 이상 보수적인 의료계가 아니라 항상 국민과 함께하는 그래서 국민으로부터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는 직업군이 되어 있길 바란다.이를 위해서는 전방위적인 ‘소통’이 필요할 것이다. 필자와 제자들 간의 소통처럼 의료계와 시민사회 간의 소통 의료계와 정부와 국민 간의 소통 그래서 사회적 대타협과 민주적 의료개혁의 성공으로 이어져야 한다. 민주주의에 근거한 이러한 소통이 필요한 곳은 의료계만이 아니다.우리가 살아가는 민생의 모든 곳에서 ‘민주적 소통’이 요구된다. 그래야 역동적 복지국가가 가능해진다. 공권력과 폭력 등의 각종 물리력이나 권위 또는 지위에 근거한 일방적 의사전달이 아니라 담론과 정책의 우위에 근거한 ‘민주적 소통’이야말로 역동적 복지국가로 가는 최상의 방법론이다.역동적 복지국가로 가는 데 있어 ‘민주적 소통’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먼저 노동의 정치가 복지국가를 추구하는 담론과 정책의 가장 활발한 소통 장소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 담론과 정책의 소통 공간으로 중산층을 끌어들여야 한다.중산층의 동의와 지지가 없는 현대적 복지국가는 성립될 수 없다. 중산층을 ‘민주적 소통’의 공간으로 데려오는 일 이 일은 노동계를 위시한 범 진보진영이 노동의 정치를 견고하게 하는 일과 함께 추진해야 할 역동적 복지국가를 위한 일대 과업인 셈이다. 그래야 ‘복지국가 정치연합’의 민주주의를 통한 복지국가 실현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1
2